<레퀴엠>과 ‘오리엔탈리즘과 전쟁의 변증법’에 관한 리뷰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예로

그대, 누구(무엇)를 위해 싸우는가?
그대, 누구(무엇)를 위해 죽어가는가?
‘조국’에 짓밟힌 그대들이여...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고싶은 사람이란 사실 없다. 타나토스(Thanatos)에게 매료되어 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이딴 섬 미군한테나 줘버리지. 그럼 집에 갈 수 있을텐데”.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속 사이고의 대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접전지였던 이오지마에서 군국주의의 상징인 일본군이 한 이야기 치고는 꽤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이보다 더 정직하게 들렸던 대사가 있었을까? 그는 결코 그 전쟁에서 죽고싶지 않았다.

영화 속 사이고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제임스 라이언’과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 ‘진석’ 형제가 그렇듯, 전쟁에서 살아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다. ‘조국’에 의해 모든 물질을 ‘약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와 뱃속의 아이에게 자신까지 ‘약탈’ 당하게 해야했던 사이고. 군인도 아니었고, 자신의 의지도 아닌 ‘조국의 명령’으로 어느날 갑자기 전쟁터로 끌려나오게 된 그에게는 위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뜨거운 애국주의로 위대하신 천황폐하와 신성한 영토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죽지 않기를. 살아 돌아갈 수 있기를. 그 한 가지 뿐이었다. 전투는 결국 미군의 승리로 끝이 나고, 일본군은 결국 전멸당한다. 미군에 의해 혹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청렴한 자살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그렇지만 그곳에서 도망쳐 살아난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이고였다. 하지만 이 끔찍한 영화보다 더 끔찍한 실제, 이오지마 전투의 사상자는 일본군 2만여명의 자결 옥쇄와 미군 2만 4천 8백여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 시인이 말했었다. 세상에 책 몇권 정도의 사연 없는 인생이란 없다고. 무덤은 장편 소설들이 모여 누워있는 곳이라고. 고작 영화를 통해 몇몇의 단편 소설을 들어준 것 밖에 없는데, 이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여져야만 했던 4만 5천여명의 사람들의 장편 소설은 누가 들어줘야 하는가? 그들의 생명은 이오지마를 지키고, 빼앗는 댓가로 정당한 것이었나? 그럼, 지금 남은것은 무엇이지? 이러한 질문은 물론, 이 전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레퀴엠>과 ‘오리엔텔리즘과 전쟁의 변증법’의 중심이 되는 이라크전에은 물론이고 사실 어떠한 명분이 있는 전쟁이든 없는 전쟁이든 상관없이 모든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 해야만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는 인간이다. 또한, 전쟁의 희생자도, 이익을 얻는 자도. 그리고 그 희생의 대가는 늘 인간의 ‘목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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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오지마로 돌아가, 사이고처럼 강제적으로 ‘조국의 부름’에 전쟁에 끌려간 이들도 있을 것이고, 개중에는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중에도 애국심 뿐만이 아닌 다른 여러 사연도 있을 것이고, ‘조국의 부름’도 아니요, ‘침략자’의 위협에 나의 부모, 자식을 죽인 그들을 위해 전쟁에 참여해 싸우다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 한국군도 있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소설보다 더 소설스런 이야기들인가.

전쟁은 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그려놓는다. ‘태극기 휘날리며’ 속 전쟁에 미쳐버린 ‘진태’의 이미지와 같이. 아, 그러고보니 ‘진태’의 대사도 생각난다.

“개새끼, 국방부 개새끼다!!”

그럼, 여기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는 (인간이 지배하는)국가다. 그것도, 전쟁 피해자들의 ‘조국’이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죄라고는 이 나라에 태어난 것 뿐인데, 죽으라니. 혹은, 살인자가 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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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도 아깝지 않은 당신”이라고 했던가? 7, 80년대 영화 속 열렬한 사랑고백을 담은 연애편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저 대사는 더 이상 감성을 자극하는 말이 아니다. 마치, <레퀴엠>의 ‘권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퍼포먼스가 의미없는 행동처럼 아무 감동없이 느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연인, 가족 혹은 뜨거운 우정을 나눈 친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실리(實利)’가 무엇인지 알고, 그 안에 살아가는 현 시대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저 대사의 상대가 절대 ‘조국’일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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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과 공포’라 했던가.

감히 저항할 생각도 할 수 없을정도로 상대방을 무력화 시켜버릴 잔혹한 피해를 선사하는 것. 그것은 친절하게도 장기화 되어지는 전쟁을 예방해 인명피해를 줄인다고 했던가.

교재 속 미군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을 당시, 민간인이 없는 지역에 폭탄이 떨어지면 충격과 공포감의 효과가 덜하기 때문에 민간인이 있는 지역으로 떨어트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이라크전이 ‘충격과 공포’였던 이유는 실상 나에게는 다른 두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북한과 늘 대치상태에 있지만 상상에서 밖에 그려보지 않았던 ‘전쟁’이라는 것이, 종종 중동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전혀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던 바로 그 ‘전쟁’이라는 것이, 그저 과거의 이야기일 뿐 21세기에 일어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전쟁’이라는 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는, 평화의 중심, 합리적인, 선진화의 중심이라 이야기하는 바로 그 ‘미국’이 전 국민과 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숨’을 상대로 가장 야만적이고 무서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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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계속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이야기 했으나, 이것은 모든 국가의 모든 국민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봤을때,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주장과는 달리 결코 군인들만의 싸움일 수 없다. 그로인해 늘 전쟁은 대대적인 ‘조국’에 의한 ‘학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라에 의해 짓밟히는 개인들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레퀴엠>과 ‘오리엔탈리즘과 전쟁의 변증법’에 나오는 ‘미국의 횡포’가 좀 더 인간적인 측면까지 내려와 ‘국가(꼭 미국뿐만이 아닌)’라는 지배계층이 휘두르는 인간에 대한 횡포로 보여졌다. 아직도 이러한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니 이 자체가 얼마나 ‘충격과 공포’인가.

개인적으로, 전쟁의 상황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은 오로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의 시선에서의 ‘휴머니즘’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레퀴엠>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금속화와 같은 ‘전쟁의 미학’이라고 불리는 부분과는 다르며, 미학적 특성에 반하는 무엇보다 비인간적이며 잔혹한 행태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상황이기에 ‘미학’이라 부를 부분은 없다고 이야기 하겠다.

모든 전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울 수 없다.
전쟁의 그 어디에도 아름다운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by EJ | 2009/04/28 18:26 | 리뷰랄까요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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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보보 at 2009/04/29 19:24
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때문에 지금 당신을 조용히 지키고 있습니다 >ㅁ<)/
Commented by EJ at 2009/04/29 22:30
이힝♡ 보보덕분에 저는 언제나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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